너를 빚진 시간

04 말해야하는데

“…그래야 널 더 오래 붙잡을 수 있잖아.”


지민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고, 너무나 솔직했다.

소희는 숨이 턱 막힌 채로, 그의 손에서 겨우 팔을 빼냈다.


 


 

 

“미쳤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일어섰고, 웃지도 않았다.

그저 소희를 그윽한 눈으로 계속 쳐다볼 뿐이었다.



 

 

“그럼 잘 자. 내일은 일찍 움직여야 하니까.”


문이 닫히고, 방엔 침묵만 남았다.


소희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붙잡는다’는 말이 도무지 무슨 의도일 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대체... 나한테 왜 이렇게 잘 해주는 거야... 우리 부모님을 죽인 조직의 아들이면서.... 왜....'






***






다음 날


오전부터 지민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소희는 그를 멀찍이 바라보며 문서를 정리했다.

전화는 짧고 날카로웠다.



 

 

“…접선 지점 바뀌었으면, 그쪽에서 먼저 공지했어야지.

그쪽 애들, 일부러 우리 엿먹이려는 거야?”


전화를 끊은 지민은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미간을 찌뿌렸다.

그 표정이 낯설었다. 소희에겐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표정.


“...무슨 일 있어요? 제가 할 일이라도...”


소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화양 쪽이 또 건들였어. 내부 자금 통로를 일부러 바꾼 것 같아.”


소희는 ‘화양’이라는 단어에 몸을 굳혔다.

그 단어는 오래전부터 그녀의 뇌에 박혀 있는 지옥의 이름이었다.

 

 



 

 

“… 화...양이요?”


“그래. 너도 알잖아. 그 조직.”


소희는 고개를 돌렸다.

그 이름을, 그의 입에서 듣고 싶지 않았다.


지민은 그런 소희를 한참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네가 알고 있는 그 일… 다 사실일까?”


“... 뭐라고요?”


“그냥. 그때 네가 너무 어렸으니까, 누가 진짜로 널 도운 건지,

누가 널 그 상황에 내몬 건지, 다시 생각해본 적은 있어?”


그 말에 소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전... 다 기억해요. 누가 제 부모님을 그렇게 만든 건지, 누가 절 이 상황으로 몬 건지.”


“그래. 너는 그렇게 알고 있겠지...”


"당신이 죽도록 싫어요. 그치만 도망치지 않을 거에요. 누구 집안처럼 비겁하게 돈 못 갚아서 사람 죽이고 모르는 척하고 그런 짓.. 안 한다구요 난."


지민은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짧은 대화는 오래 남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지민의 눈빛은 마치… 미안함 같았다.






***






자신의 집무실 쇼파에 지민은 깊이 생각에 잠긴 채로 앉아있었다.

그리곤 옆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는 해진에게 말을 걸었다.


“... 소희는 어때? 시키는 일은 잘 하고?”


“잘 적응 중이긴 한데, 가끔 뾰루퉁해있으면 무슨 말도 못 하겠더라.”


"그렇군..."


“소희한테 그 얘긴 안 한 거지? 니 부모님 얘기.”


“아직.”


“언제까지 숨길 거야. 걘 아직 네가 연성 사장 아들이란 것도 모르잖아.”

지민은 고개를 숙였다.

 

 



 

“…말하면 무너질 것 같아서.”


“그래도 언젠간 말해야 해 .

화양이 자기 부모 죽였단 사실을... 연성이 죽인 줄 알고 있잖아.”


"차라리 숨길까도 고민해봤어. 복수하는 삶을 살까봐 걱정..이네"


"너 설마 걔... 좋아하냐?"

 

 

“그냥 곁에 있어주려는 거야, 걱정하지마.”

 

 



 

지민은 말없이 커피를 들었다.

그 안에서 흔들리는 건, 액체가 아니라 감정이었다.